
“AI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은 흔해졌지만, 건설 현장의 체감은 여전히 다릅니다. 데이터는 현장·협력사·본사에 흩어져 있고, 공정이 나뉜 만큼 책임도 쪼개져 있습니다. 제도는 사람 중심으로 설계돼 자동화 기술이 들어올수록 충돌 지점이 늘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건설산업연구원(건산연)이 4월 7일 서울 강남구 건설회관에서 연 ‘건설산업 재탄생(Rebirth) 2.0’ 세미나가 주목받은 이유는, AI를 “도구”가 아니라 산업을 굴리는 규칙 자체를 다시 짜는 과제로 꺼내 들었기 때문입니다.
1) “불황”이 아니라 “구조”가 흔들린다: 왜 ‘골든타임’이라고 했나
첫 발제에서 손태홍 건산연 건설기술·관리연구실장은 건설산업 위기를 단순 경기 침체가 아닌 존립이 흔들리는 구조적 위기로 진단했습니다. 업종·직무가 과도하게 세분화돼 협업이 어렵고, 이해관계자는 많지만 책임 주체를 명확히 가르기 힘든 구조가 굳어졌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여기에 산업 단계별로 여러 부처의 개별 법·제도가 얽히면서 분절이 더 심해졌다고 짚었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AI·디지털 전환이 ‘새 장비를 들여놓는 일’이 아니라 누가 어떤 데이터를 만들고 공유하며, 결과에 누가 책임지고, 성과를 어떻게 나눌지를 다시 묻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손 실장이 공정·상생, 융합·확장, 자율·혁신을 원칙으로 ‘신뢰 중심의 협력 질서’를 강조한 배경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2) AI는 생산성의 지렛대이지만, 준비 없이 들어오면 갈등이 된다
두 번째 발제에서 최석인 건산연 기획경영본부장은 AI가 건설산업 전 영역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건설산업은 일회성·현장성·분절성 탓에 표준화와 데이터 축적이 어렵고, 단기 성과 중심 문화로 3·4차 산업혁명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진단도 함께 제시됐습니다.
발표가 설득력을 얻는 지점은 ‘AI가 한계를 넘길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일자리 구조의 대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경고가 동시에 나왔다는 점입니다. AI·로봇 도입은 단순 반복 작업을 줄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현장에 좋은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직무가 재설계되지 않고, 안전 책임과 운영 프로세스가 정리되지 않으면 기술 도입은 곧바로 충돌과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결국 업계가 준비해야 할 것은 ‘AI 기능’보다 현장을 움직이는 방식(업무·책임·교육)의 재정렬입니다.
3) 건산연이 제시한 실행 축: 데이터 통합 생태계가 먼저다

전영준 건산연 연구센터장은 대전환을 위한 ‘인프라’로 데이터 통합 생태계를 강조했습니다. 정부는 공공공사 데이터를 전주기(기획-설계-시공-유지관리)로 통합하고, 민간은 표준화된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데이터와 AI 모델을 구축하는 ‘이원화 체계’ 제안이 핵심입니다.
이 제안이 현장에 던지는 질문은 의외로 실무적입니다. 우리 조직(혹은 프로젝트)은 설계-시공-유지관리 정보가 실제로 이어져 있는지, 협력사·현장·본사 사이에서 같은 정보를 같은 의미로 부르는지, 데이터 품질과 수정 이력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데이터가 연결되지 않으면 AI는 보고서와 시연 단계에서 멈추고, 현장 적용은 늘 ‘추가 업무’로만 남기 쉽습니다.
4) 기술보다 더 빨리 부딪히는 것: 인간 중심 규정과의 충돌
전 센터장은 AI·로봇이 들어오면 기존의 인간 중심 법·제도와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예로는 건설기계관리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거론됐고, 해법으로 제도 개정과 규제 샌드박스 도입이 제안됐습니다.
기업 관점에서 이 대목은 “기술이 있느냐”만큼이나 “규정을 통과할 수 있느냐”가 도입 속도를 좌우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기술이라도 적용 범위, 책임 주체, 안전 검증 방식이 정리돼 있지 않으면 현장은 보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준비는 장비 목록이 아니라, 도입 시 예상되는 규정·안전 포인트를 미리 정리하고(내부 체크리스트화), 실증 과정에서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안전성·운영절차·책임 구조)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5) 공공조달이 움직이면 시장 표준이 바뀐다: ‘런칭 고객’의 의미
전 센터장은 공공조달이 신기술 도입의 런칭 고객이 되어 AI 확산을 견인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공공 발주 비중이 큰 시장에서 초기 수요가 형성되면 기술은 빠르게 표준이 됩니다. 반대로 공공조달이 요건을 바꾸는 순간, 업계는 더 높은 수준의 근거를 요구받게 됩니다.
즉, 공공조달의 변화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시험대’입니다. 실증 자료, 안전성 검토, 운영 절차, 현장 적용 후 성과 측정 방식이 정교해질수록 준비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격차가 커질 수 있습니다. AI가 현장에 들어오는 순서도 “민간에서 먼저”가 아니라 “공공 발주 요건이 표준을 만들고 민간이 따라가는” 형태로 바뀔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기사에서 공공조달의 역할 변화를 강조한 맥락 기준).
지금 당장 할 일 vs. 조금 기다리며 볼 일: 준비의 우선순위 정리
지금 당장 할 일은 대규모 투자 결정보다 ‘준비의 형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데이터가 어디에서 생성되고 어디에서 끊기는지부터 맵을 만들고, AI/로봇 적용 시 충돌할 법·안전 포인트를 사전에 목록화해두면 제도 논의가 열릴 때 대응 속도가 달라집니다. 이때 중요한 건 “우리도 AI 한다”가 아니라, 실제 현장 운영에서 어떤 정보가 빠지고 어떤 책임이 애매한지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조금 기다리며 볼 일도 분명합니다. 기사에는 구체적인 시행 일정, 예산, 단계별 로드맵이 명시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언제 의무화되는지 확정되기 전까지는, 되돌리기 어려운 대규모 투자보다 표준화·파일럿 설계·실증 레퍼런스처럼 ‘축적되는 준비’를 먼저 쌓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이후 공공공사 데이터 전주기 통합이 어떤 표준으로 구체화되는지, 규제 샌드박스와 법 개정이 어디부터 열리는지, 공공조달이 런칭 고객 역할을 제도적으로 어떻게 뒷받침할지—이 세 가지를 관찰하면 됩니다.
건산연이 말한 ‘골든타임’은 기술 쇼핑의 타이밍이 아니라, 데이터·책임·안전·조달이라는 운영 규칙을 재정렬할 수 있는 창에 가깝습니다. 결국 AI는 혼자 들어오지 않습니다. 데이터를 끌어오고, 제도가 길을 내고, 조달이 수요를 만들 때 비로소 현장에 자리 잡습니다. 업계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 연결고리를 먼저 정리하는 것입니다.
확인한 기사: ele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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